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베 사다 사건 (문단 편집) === 게이샤, 유녀 시절 === 그 무렵의 아베 사다는 집에서 현금을 가지고 나와 불량한 친구들과 함께 아사쿠사 부근에서 놀러 다니고 있었는데 그 금액은 현대의 금액으로 환산하면 10만엔에서 60만엔이라는 큰 액수였다. 이 큰돈을 들고 10명 이상의 불량소년을 데리고 능운각에서 영화를 보고 밤에는 술집에서 놀러다니다가 밤늦게 귀가하는 생활을 1년 동안 계속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호되게 꾸짖고 집에서 문을 닫거나 엄하게 훈육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비행을 멈추지 않았고 어느덧 아사쿠사의 여자 조폭 '작은 [[벚꽃]]의 오쵸(小桜のお蝶)'와도 겨룰 정도가 되어 칸다 지역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이렇게 사다가 통제 불능 수준이 되자 [[1922년]] 보다못한 사다의 아버지와 오빠는 공모하여 그녀를 [[요코하마시|요코하마]] 유곽의 [[포주]] 아키바 마사요시(秋葉正義)에게 게이샤로 팔아 버렸다. 이때 그녀의 아버지가 아베 사다에게 했던 소리가 '그렇게 남자가 좋으면 창녀로 팔아버린다.(そんなに男が好きなら娼妓に売ってしまう)'였다.[[https://bunshun.jp/articles/-/42600?page=5|#]] 사다의 큰언니인 아베 도쿠는 사다가 게이샤가 되기를 원했다고 증언했으나 사다 자신은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난잡함에 대한 벌로 그녀를 게이샤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아베 사다에게 게이샤 세계와의 만남은 불만스럽고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게이샤들 사이에서 진정한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과 음악을 배우고 공부하는 견습생 생활이 필요했다. 당시 아베 사다는 뚜쟁이 아키바에게 [[요바이]]를 당했고 아키바를 자신의 뒤를 보호해 주는 배후자로 선택했으며 요코하마와 나가노에서 게이샤로 일하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집이 전소된 아키바를 구하기 위해 선금 1,000엔[* 당시에는 훌륭한 집을 지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다.]의 빚을 얻어 도야마의 [[게이샤]]에 팔려 아키바 일가를 돌보았다. 당시 잘나가는 게이샤가 됐지만 20살 때 아키바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인연을 끊으려고 했다. 관동대지진으로 집을 잃은 게이샤의 주인과 그 일가를 아베 사다가 부양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주인이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는 등 아키바에게 농락당했다. 게이샤집과의 계약이 아키바에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빚을 갚기 위해 인연을 끊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게이샤에서 [[창녀]]로 전락했다. 자세히 말하자면 그 빚을 갚기 위해 1925년 [[나가노현]] [[이다시]]의 '미카와야'라는 가게로 바꾸었고 이이다에서는 불견전 게이샤(不見転芸者)[* 상대를 선택하지 않고 돈에 따라서 손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싸구려 게이샤]가 됐는데 당시 '시즈카'라는 이름을 쓰면서 잘나가는 게이샤가 되었지만 [[매독]]에 걸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합법적으로 허가된 [[매춘부]]처럼 정기적인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아베 사다는 여기서 더 나은 보수를 받는 직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아베는 이이다의 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차라리 '창기(창녀)가 되는 편이 낫다[* いっそ娼妓になったほうがまし]'고 말하면서 1927년 22세의 나이로 히다로 갔다. 그녀는 히다 대문 거리의 '미소노루(御園楼)'라는 고급 상점의 매음굴에서 엔마루(園丸)라는 이름의 [[매춘부]]로 1년여 일했는데 이곳에서 당시의 가장 인기 있는 매춘부 중 한 명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녀의 가불금은 당시 2,800엔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당시 '히다 유곽의 연혁'에 따르면 아베 사다와 거의 같은 시기 히다 유곽의 유곽 평균 가불금은 약 1,500엔, 최고는 '바리'에 있었다는 '바야'의 4,800엔이었다. 따라서 아베 사다의 가불금은 평균의 2배 가까웠고 유녀로서는 탑 클래스였다. 창백하고 콧날이 곧았다는 그녀의 미모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일이 게이샤에게 주는 보수보다 훨씬 나았는데 의료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도 그랬다. 하지만 사다는 곧 이곳에서 트러블 메이커로 명성을 얻었다. 그녀는 고객들의 돈을 훔치면서 매음굴을 나가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법적인 성매매 시스템이 잘 짜여 있었던지라 곧 추적당했다. 그녀는 이때의 일을 '아베 사다 사건' 후의 예심 신문에서 이렇게 말하했다. >'미소노루'는 당시 [[오사카]]에서 일류였습니다. 저는 인기있어서 3장[* 잘나가는 넘버 쓰리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는 의미]으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부터 저는 손님을 상대하는 것이 싫지 않았기 때문에, 포주님의 예쁨을 받아 미소노루에서 재미있게 일했습니다. 1년쯤 지났을 무렵, 어느 회사원 손님이 저를 낙적[* 손님이 유곽에 돈을 내고 유녀를 사는 것. 이렇게 하면 유녀는 유녀 명단에서 빠지고 손님의 아내나 첩이 된다.]해 주기로 했는데, 그 사람의 부하 직원도 제 손님임을 알고 낙적 이야기는 망쳐지고, 손님으로부터 용서해 달라고 해서 돈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썩어 있는데 소개업자에게 제의를 받아서 이듬해부터 23살 때, [[나고야시]] 니시구 하에마치에 있는 토쿠하루로(徳栄楼)에 빚 2,600엔으로 이사했습니다. 이곳으로 옮길 때 그 포주는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여자를 원했대요. 나는 얼굴이 길고 어느 쪽인가 하면 드세고 말괄량이 같은 여자이며, 소개업자에게 꼭 안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안게 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안다'라는 말은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사이라는 것이다.] 당시 그 사정을 모르는 저는 포주 우치노에 씨를 마지못해 안고 있어서, "이름 따위는 뭐든지 좋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저는 "내가 포주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포주의 마음에 들도록 해보이겠다"는 생각에 '사다코'라는 게이샤 이름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https://yonezawakoji.com/yukakuakasen-tobita-abesada/|#]]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youguchishinchi139-min.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yrpw_eDy0QM)]}}}|| ||<-2> {{{#ffffff ''' 타이쇼루(大正楼) ''' }}} || 이사한 [[나고야시|나고야]]의 토쿠하루로에서는 당시 업주가 '도망가면 네 부모의 재산을 압류해 한꺼번에 빼앗는다'고 말해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2년 정도 일하다가 [[티푸스]]를 앓고 싫증이 나서 다시 [[오사카시|오사카]]로 돌아와 송도 유곽의 격이 낮은 도루(都楼)에서 2,000엔 정도의 가불금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불편한 손님에 싫증을 느껴 [[도쿄]]로 도망가다가 도루에서 찾으러 온 남자에게 잡혀 단바시노야마([[효고현]])의 '타이쇼루[* 2019년 철거됐다.]'에 강제로 팔렸다. 추운 겨울밤에도 밖에 나가 손님을 유치하는 엄청나게 힘든 근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다는 이곳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곳으로 꼽았다.] 계속해서 하급점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6개월 만에 타이쇼루를 빠져 나온 후에 매춘 허가 제도를 탈출하는 데 성공하고 카페 여급[* 이 시대의 카페는 유흥업소에 가까웠으므로 현대의 [[카페 아르바이트]]나 직원보다는 [[다방]] 종업원을 생각하면 된다.] 웨이트리스로 일하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임금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견실해져도 따라잡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오사카의 매음굴에서 고급 [[창녀|창부]][* 누옥에 속하지 않고 주인 한 사람 소유로 매춘하는 사람을 말한다.]가 되어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살던 중 1933년 1월 어머니 아베 카츠가 세상을 떠났다. 아베 사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소를 방문하기 위해 도쿄로 갔는데 [[도쿄]]에 있는 매춘 시장에 진출했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한 남자의 [[첩]]이 되었다. 1934년 1월 부친이 중병에 걸리고 아베 사다는 아버지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열흘 동안 간호했다. 당시 그의 아버지가 아베 사다에게 한 소리가 '내가 너한테 간호받을 줄은 몰랐어'였다. 1934년 10월 20대 후반이 된 아베 사다는 당시 그녀가 일하던 무허가 매음굴을 경찰이 급습하면서 체포되었다. 매음굴 주인의 절친한 친구 가사하라 키노스케가 아베 사다의 석방을 주선했다. 가사하라는 그녀에게 빚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아베 사다에게 끌렸고 사다와 합의 후 그녀를 그의 [[정부]](情婦)로 삼았으며 1934년 12월 20일 그녀를 위해 집을 마련하고 그녀에게 소득을 제공했다. 그는 사건 당시 경찰에 이렇게 진술했다. >"그녀는 정말 강했고, 정말 강력한 사람이었어요. 비록 내가 꽤 지쳐있지만, 그녀는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죠. 우리가 하룻밤에 2번, 3번, 4번 하지 않는 한 그녀는 만족하지 않았어요. 밤새도록 사적인 부분에 손을 대지 않는 한 그녀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처음에는 좋았지만, 몇 주 후에 나는 조금 지쳤어요." 가사하라는 사다에게 "아내를 버릴 테니, 나와 결혼하자"고 제안했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사다는 가사하라에게 "다른 애인을 데려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가사하라도 거절했다. 이후 이 둘의 관계는 끝났고 가사하라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아베 사다는 [[나고야]]로 떠났다. 당시 가사하라는 아베 사다에 대해 "그녀는 나쁜 여자입니다. 그녀는 걸레이자 창녀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한 짓이 분명하듯이, 그녀는 남성들이 두려워해야 할 여자입니다."라고 말했다. 아베 사다는 가사하라와의 관계가 학대적이었다고 진술하면서 "그는 나를 사랑한 적도 없고 동물처럼 대했다. 그는 내가 헤어지자고 할 때마다 나에게 애원하는 그런 남자였다"고 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